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 사태 (문단 편집) == 기타 == * 김신조의 자서전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동아출판사, 1994)에 의하면 침투 당시 수신했으나 암호담당자가 없어서 해독하지 못했던 암호를 훗날 중앙정보부에서 해독해 보니 내용이 '''원대 복귀'''였다고 한다.[* 북한 입장에서도 공비는 훈련에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에 쓸데없는 인력 낭비를 자제하기 위해 복귀하라고 한 모양이다.] 이는 [[TV조선]]의 방송과 2014년 11월 30일 자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도 소개되었다. 이후 채널 A의 '이제 만나라 갑니다'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나무꾼에게 발각된 후 향후 지침을 요청했고 이때 수신한 내용이 '원대복귀'였으나 수신한 [[난수방송]]을 해석할 수 없었고 이때 배신감을 느껴서 전향을 고려했다고 한다. 한편, 해석이 안 되었던 이유는 난수표를 잘못 가져와서였다. * [[김만철]] 일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귀화를 고민할 때 김신조는 김만철 일가의 귀순을 설득하기 위해서 직접 대만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김신조는 김만철과 동향인 청진 출신에 동네까지 같았다고 하며 김만철을 보자 '''[[https://youtu.be/pvwFKuGDwy8?t=598|"만철이 형 아니오! 나 신조요. 정미소 집 아들."]]''' 이라고 반가워했다고 한다. 당시 대표단에는 귀순용사 [[이웅평]] 대위와 같이 동행했다고 하는데 김신조는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을 보여주고 이웅평은 자동차키 여러 개를 보여주면서 '''"나는 부모형제를 두고 홀로 내려와 이렇게 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는데, 댁들은 부모형제를 다 모시고 계시면서 왜 자유로운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저도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까 꼭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세요."''' 라면서 무려 5시간이나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김만철은 5시간이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귀가 솔깃했고 듣다가 질린 김만철의 처남이 "죽을 거면 서울로 가서 죽겠다" 는 심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 당시 무장공비들은 진지하게 자신들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월남했고 남조선 인민들이 [[적화통일/한반도|적화통일]]을 바란다고 '''진심으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침투 중 마주친 나무꾼 형제들을 살려줬던 부분도 나무꾼 형제들이 [[무산계급]]이기에 자신들을 신고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컸다. 북에서 아무런 제지 없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고. 소탕 작전 중 총상을 입은 한 무장공비는 민가에 숨어들어 "이북에서 왔는데 총에 맞아 다쳤으니 사흘만 먹여주고 재워달라."고 하자 집주인 노인이 밥을 챙겨주고 방을 내어주는 등 안심시키는 사이 아들이 군경에게 신고했다고 한다. 노인이 밥도 챙겨 주고 잠자리도 내 주자 감동한 무장공비는 '내가 통일이 되면 [[조선로동당|당]]에 잘 말해서 꼭 보상을 해드리도록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공비는 잠을 자던 중에 신고를 받은 국군이 들이닥치자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 공비들은 전원 [[인민무력부|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에 있는 '도발사령부' 소속인데 도발사령부에서는 여기 투입할 공비를 육성하기 위해 124부대를 창설하고 이재형 대좌가 124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https://www.dogdrip.net/27313188|#]] * 공비들 대부분은 원래 부사관으로 하사~중사였는데 이 작전에 투입되는 조건으로 전부 소위로 특진해서 공비 전원이 장교였다. 단 중위 이상은 원래부터 장교였던 인원이다. 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307|공비 전원이 함경도 출신]]이다. * 어떤 공비는 남방한계선 바로 코앞까지 가서 사살당했는데 시신을 확인해 보니 손과 발이 전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고 무기조차 없었다고 한다. * 총조장이었던 김종웅 상위는 첫 교전이 붙자마자 '국방군 출동이다! 청와대 앞으로 돌격하라'라고 외쳤지만 공비들은 삽시간에 아연실색하여 각자 도주하여, 김종웅도 어쩔 수 없이 도주하였다. 무려 나흘동안 도주하다가 1월 26일 0시 25분경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애기수바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월남전 영웅인 천 하사의 부대에 발각되었다. 김종웅은 당시 홀로 도주하고 있었는데, 천 하사의 저격에 가슴에 2방을 맞고 쓰러지고, 오른팔 하나가 수류탄에 날아가는 상당한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상위는 남은 한팔로 수류탄을 까들고 홀로 적진부대에 돌격하다가 다시 천 하사 부대원들의 무차별적인 저격에 최후를 맞았다. 당시 새벽이라 어두운 탓에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 천 하사의 부대가 시체를 수색하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김종웅 상위의 시신은 가슴에 세 발, 머리에 두 발, 수류탄 폭탄으로 날아간 한 팔에 몸 자체가 [[벌집]]이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죽어서도 남은 한팔로 수류탄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그 모습에 천하사 부대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출처: 회고록) * 당시 무장공비가 31명이 아니라 33명이었고 2명은 남한에 의해 간첩으로 포섭되어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고 상좌(대령)급 탈북자 홍은택(가명)이 증언했다. 북으로 돌아간 사람은 우명훈과 8대대 대대장인 임태영인데 인민군 영웅이 되었지만 1998년 간첩 혐의로 사형되었다고 한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주장이며 애초에 일원이었던 김신조의 말과도 틀린 부분이 많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7288385|#]] * [anchor(인천)]이 사건에 관해 [[행정법]]학계에서 [[행정개입청구권]]과 관련한 중요한 판례가 생기는 [[이용선씨 피살 사건]]이 발생했는데 민간인 희생자 중 하나로 당시 [[체신부]] 공무원 이용선 씨는 자신의 집에 들어온 이들을 혼자 대적하였고 그동안 가족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파출소로 가서 출동을 요청했으나 소장이라는 작자가 '''[[직무유기|군경이 출동하고 안 하고는 자신들 재량에 달려 있다]]'''며 개입을 거부하다가 무려 15분이나 지난 뒤에야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씨는 용감하게 격투를 벌이다가 결국 살해당했고 늑장대응한 파출소장은 며칠 뒤 [[파면]]당했다. 가족들은 당연히 국가[[손해배상]] 재판을 걸었는데 많은 이들이 군경의 늦장대응에 의문을 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이용선 씨의 유족들이 재판에서 승리했다. 당시 판결에 따라 '아무리 경찰이 출동하고 마는 일이 재량에 달려 있을지라도, 위급·긴급한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재량이 0으로 수축되면 즉시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이 확정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 판결문 일부를 발췌하자면 이렇다. >무장공비 색출체포를 위한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출소 소장, 순경 및 육군 장교 수명 등이 파출소에서 합동대기하고 있던 중 그로부터 불과 60-70미터 거리에서 약 15분간에 걸쳐 주민들이 무장간첩과 격투하던 주민 중 1인이 무장간첩의 발사 권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면 위 군경공무원들의 직무유기행위와 위 사망인의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대판 1971. 4. 6, 71 다124) * [[칠궁]]은 본래 청와대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김신조 사건 이후 보안상의 이유로 통제되었고 옆에 도로를 만들면서 사당도 다소 축소되었다. [[2022년]]에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윤석열]]이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는 바람에 [[칠궁]]이 [[청와대]]와 같이 개방되었다. * 영화 [[실미도(영화)|실미도]] 오프닝에서 [[https://youtu.be/be7Hr5fLgLE|잠시 묘사된다.]]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 도중 한국군과 교전하고 [[김신조]]가 쫓기는 장면과 강인찬([[설경구]])이 다른 조폭 보스를 살해하고 경찰에게 쫓기는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이 장면에서 김신조를 연기한 사람은 연극배우 신덕호다.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 11회[* [[김신조]] 역할은 배우 '''[[성동일]]'''이 맡았으며 조장 김종웅(극중에선 김시웅이라는 이름으로 각색됨.)의 역할은 야인시대에서 부산 도끼파의 두목 역을 담당한 황진영이 맡았다.], 2005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 62회에 이 사건이 나온다.[* 코리아게이트와 영웅시대 두 드라마 모두 [[박정희]] 대통령 역할은 배우 '''[[독고영재]]'''가 맡았다.] * 이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전체가 6.25 전쟁 휴전 후 재건기의 막바지였던지라 당시 서울시의 미개발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동작구]] 일대에는 부동산 붐이 일었고 (당시 기준으로) 200만원짜리 건물이 500만원 선에서 팔리는 경우까지 있었으나 이 사건 이후 동작구 일대를 포함한 서울시의 상당수 지역에서 부동산 거래가 금지되었고 2~3여년 뒤 금지 조치가 풀렸을 때는 이미 붐이 끝나 거품이 상당히 걷혀서 [[관악산]] 일대의 험준함이라는 단점이 크게 부각되어 버려 노량진 2동 일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전부 폭락해버렸다고 한다.[* 노량진 학원가 일대도 타격을 입기는 했으나 원래 [[노량진수산시장]]이 근처에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여서 타격이 덜했고 나중에 일대가 학원가가 되면서 대박을 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처분도 힘든 거, 그냥 여기서 정착하자!'면서 동작구 여기저기에 눌러앉은 후 지금까지 해당 지역에서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꽤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어르신들 가운데 김신조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다. * 노원구의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전시한 자료 중에는 이 당시 상황에 얼떨결에 휘말린 신혼부부의 이야기가 있다. 이 신혼부부는 [[결혼식]]을 올린 뒤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신혼여행]]을 했는데 한강다리를 건널 때 한 무리의 헌병들이 차를 세우고 검문했다. 군인들은 택시에 장식된 꽃과 뒤에 매달린 깡통을 보고 신혼부부가 탄 차임을 깨닫고 손을 흔들며 통과시켰다. 이 신혼부부는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했다가 나중에 이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http://press.uos.ac.kr/news/articleView.html?idxno=11707|#]] [[분류:1968년/사건사고]][[분류:종로구의 사건사고]][[분류:제3공화국/사건사고]][[분류:김일성 시대]][[분류:북한/대남 도발]][[분류:남파 간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